안녕하세요. 오늘은 자격증 시험이 아니라 2017년 당시 적었던 글들을 올려봅니다.
[결핍 1] <2017년 고3 수능 영어 46쪽 6번에 대한 발표>
저는 짜장면과 짬뽕을 좋아합니다. 근데, 항상 이 둘 중 하나를 먹기 위해 고민을 합니다. 짜장을 먹어야 할까, 짬뽕을 먹어야 할까. 그러던 어느 날, 저는 평소처럼 고민을 하다가 친구가 라면을 끓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같이 라면을 먹은 뒤에 생각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친구와 같이 라면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다 먹고나니 배가 부르고 나른해져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일어나 책을 읽고, 그렇게 까마득히 잊어버렸습니다. 저는 이 일을 통해 가장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면 어떤 문제든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결핍해소’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를 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옷을 입는 것도 모두 ‘생존’하기 위해서라는거죠. 그리고 우리는 이 문제를 좀 더 고차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종교’ 말고도 책을 쓴다든지 아니면 토론을 한다든지 등을 통해 좀더 깊이 그리고 좀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고민해왔지만, 그중에서 저는 ‘종교’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최초로 생겨난 후, 지금까지 우리 삶은 개개인의 생각에 따라 변화하였습니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였기에 ‘학교’가 생겨났고, 또 누군가는 하늘을 날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비행기’가 만들어진거죠. 그런데, 이것과 ‘종교’가 과연 어떤 관련이 있을까. 저는 ‘종교’의 개념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대상’에서 파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늘’을 모르기 때문에 ‘하늘’을 신으로 섬긴 것이고, 내가 ‘바다’를 모르기 때문에 ‘바다’를 신으로 섬긴거죠. 그 결과, 우리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또는 두려움을 극복해내기 위해 연구하고, 개발하고, 개척해나갔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추진해나가기 위해 ‘의지할 대상’을 생각해낸거죠. 이로 인해 우리는 삶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발표할 영어지문은 문제해결을 위한 방법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물건을 고장 내기’ 저는 이 방법이 문제의 근본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미로 게임을 할 때, 출발선에서 시작하여 여기저기로 마구 길을 찻듯이, 문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든 한번에 해결하지 못하고 여러번의 실수를 통해 해답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실수’는 문제해결로 가는 ‘필수’인거죠. 그래서 이 본문에서는 복잡한 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실패하게 하여 그것의 한계를 시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공에 가까워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말로 우리는 완벽한 해답을 얻게 되는걸까.
입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반복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완성’이라 부르게 될 것이고 항상 오류는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완전하지 않은 완성’ (끝나지 않는 공식)이라고 부릅니다. ‘고의적으로 물건을 고장내기’ 이것은 문제의 근본에는 가까워지겠지만 문제원인을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 ‘결핍’을 완전히 채울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가장 근본적인 부분을 절대 해결할 수 없는가.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이룬다고 해도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배고픔’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고, 완전한 ‘즐거움’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외로운거죠. 즉, 매일 ‘부족함’을 충족시킴에도 불구하고 매일 ‘부족함’을 느끼게 되는 역설적인 결과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래 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삶의 ‘결핍’을 다 채우지 못하고 그렇게 가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려면 ‘절대신’께 의지해야 한다고, 삶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리하여 아까 언급한 ‘종교’가 생겨나게 되고, 이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삶의 결핍을 합리화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성경책’의 ‘열왕기상’ 부분을 참고하여 요약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악독한 왕들 중 하나인 ‘아합’왕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각종 우상들을 섬기며, 자신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엘리야’라는 선지자를 통해 ‘아합’왕에게 3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농업국가로, 전체 직업군이 대부분 농사꾼이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 비가 3년동안 오지 않는다는 건 ‘국가적 재난’, ‘총체적 난국’ (결핍) 인거죠. 이에 열받은 ‘아합’왕은’엘리야’를 잡기 위해 전국으로 군사를 보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아합’왕은 문제의 원인이 ‘엘리야’에게 있다고 보고 3년 내내 ‘엘리야’만 쫓아다닌 겁니다. 이것을 우리 생활에 적용하면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거죠. 어찌됐든 그렇게 3년 내내 엘리야를 못잡은 ‘아합’왕 앞에 어느날 ‘엘리야’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섬기는 우상과 내가 믿는 하나님 중 누가 진짜 신인지 알아보자.’ 이 말을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지금껏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한 방식들이 과연 옳은가. 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이단 선지자 850명과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 엘리야 1명의 대결이 벌어집니다. 대결 방식은 간단합니다. 신께 기도하여 제물을 바친 제단의 불이 나타나게 하는 겁니다. 거기다가 엘리야는 이단 선지자들이 더 좋은 제물과 더 나은 제단을 고르게 하고 먼저 시작하게 핸디캡까지 줬습니다. 그리하여 이단 선지자 850명은 온몸에 상처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춤을 추며 기도하는데 불을 커녕 불씨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차례가 되었을 때, 엘리야는 물을 제단에 부어서 제단 옆에 도랑이 생길 때까지 흥건하게 물을 적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야는 온몸에 상처를 내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단지 한마디만 합니다. ‘주여, 저들에게 당신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옵소서.’ 그러자 그 즉시, 제단에 불이 발생하는데 제단을 적시던 물과 심지어 옆에 흐르던 도랑까지 다 말라버릴 정도로 활활 타오르는 불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끊임없이 노력한다 할지라도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고, 문제의 근본이 어디있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쓸데없는 짓에 불과하다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것이 사실은 거짓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들 앞에 놓인 스위치들 중에 새로운 하나를 슬적 건네주는 것 뿐입니다. 선택은 제가 아닌 여러분들이 하는 겁니다. 아무리 결과를 안다 하더라도 다른 결과를 선택할 수 있는 거니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단 선지자 850명과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 1명의 대결을 보고 누구를 믿었겠습니까?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알, 앗세라 등의 우상을 믿자니 여호와가 두렵고, 여호와를 믿자니 우상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850 vs 1 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고, 결과가 어떻게 끝났는지 아는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들 앞에는 보이지 않는 스위치들이 많이 놓여 있습니다. 그 스위치들 중 어떤 스위치가 제일 좋은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스위치를 누른다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문제해결을 위한 첫시작이기 때문이죠. 이상으로 발표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결핍2] <문화, 착각과 깨달음의 사이>
문화란 과연 무엇일까? 저는 문화를 한눈에 쉽게 보여주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면 (선사기대 및 고조선 → 삼국시대 → {통일 신라, 발해} → 고려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 대한민국)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선사시대 및 고조선 때 인간은 그저 신의 대리인으로서 동물, 자연 등을 섬깁니다. 시간의 흐름은 의식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어디선가 ‘고타마 싯다르타’ 라는 사람이 부처가 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로 인해 삼국시개 때는 불교를 중심으로 나라가 변화합니다. 게속해서 흘러가는 시간은 우리는 ‘고려’를 거쳐 ‘조선’이라는 나라에 데려다 줍니다. 고려 후기부터 ‘유교’가 발전한 조선은 사람이 자연현상 또는 사회현상을 이해하고 해석한 일종의 ‘편견’을 나라의 기준으로 삼고 이를 중심으로 나라가 또 변화합니다. 흐르는 시간은 지식과 경험의 축적으로 이어지고 이로인해 과거보다 자신감이 생기고 지식이 쌓은 사람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문화를 확장합니다. ‘아, 내가 다른 나라에 문화를 전파할 수도 있겠구나.’ 대한제국 시기에 오면 여러 나라들이 우리나라를 침략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수많은 전쟁을 겪어왔지만, 대한제국 때 와서는 그것을 ‘고조’시키는 단계에 이르게 되고 결국, 일제 강점기라는 ‘절정’에 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여기서 그들은 자신의 문화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물론,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도 있겠지만 그 의도조차도 자국의 문화에 의해 형성된 것이겠죠. 어찌됐든, 그들이 시작한 전쟁은 그들이 끝내게 되고 우리는 ‘대한민국’ 이라는 현재에 도착합니다. 현대 문화는 게속해서 변화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나라와 나라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금, 세계화된 우리의 문화는 이전보다 공통점이 뚜렷해졌는데 가장 잘 드러나는 점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변화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은 영화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는데 우리가 잘 아는 영화 중 대표적으로 ‘수퍼맨 리턴즈’, ‘배트맨 비긴즈’, ‘스파이더맨3’ 등을 살펴보면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과연, 우리에게 신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수퍼맨 리턴즈’를 보면 수퍼맨이 우주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서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들아, 인간은 나약하고 어리석지만 그들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네가 그들을 지켜줘라.’ 이 말을 잘 보여준 영화가 바로 ‘트랜스포머 시리즈’ 입니다. ‘트랜스포머’ 영화를 보면 처음엔 나약한 인간들이 점점 센티넬과 디셉티콘을 뛰어넘어 오히려 그들이 인간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더 심화시킨 영화가 ‘인터스텔라’인데, 특히 명대사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라는 말에서 굉장한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이것을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스스로 신이라 한다.’ 라고 볼 수 있지만,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인간이 모든 것의 주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영화 뿐만 아니라 게임에서는 이러한 점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메이플스토리’, ‘던전 앤 파이터’, ‘리그 오브 레전드’, ‘오버워치’, ‘서든어택’ 등이 있는데 이들의 특징은 ‘내가 창조하고 내가 다스리고 내가 파괴한다. 그러나 나는 하지 않는다.’ 입니다. 이 말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게임을 할 때 게임 캐릭터를 생성합니다. 우리는 그 캐릭터를 우리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습니다. 몬스터를 잡거나 다른 캐릭터를 죽이는 식으로 말이죠.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것을 당하진 않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있는거죠. 6~7년 전에 살인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살인범은 놀랍게도 초등학생인데, 같은 또래의 친구를 커터칼로 목을 찔러 죽였다고 합니다. 그 학생은 친구가 게임에서 처럼 리스폰 될 줄 알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간접적으로 자신이 신 (하나님)이 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엄청난 교만함’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모든 것의 주체’로 해석되는 이상한 세상에서 말이죠. 사실, 인간은 탄생할 때부터 신이 되기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죠. 만일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성공하고 싶어하고 왜 권력을 얻고 싶어하고 왜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자신이 신이 되기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그 방법이 잘못된 것임을 인식할 수 조차 없을 지경에 이를때까지. 과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무엇을 공부하는 걸까요. 문화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착각과 깨달음의 사이가 얼마나 가깝고도 멀리있는가를 명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결핍 3] <기억(경험)의 상실단계>
1의 오류란 무엇일까?
- 기억(경험)의 조작화 (첫번째 개념의 조작) : 숟가락, 젓가락을 배울 때 사용하는 물건의 조작적 정의
- 기억(경험)의 착각화 (두번째 개념의 착각) : 숟가락, 젓가락을 사용할 때 무의식적으로 새겨진 착각의 정의
- 기억(경험)의 망각화 (세번째 개념의 망각) : 포크와 나이프를 배울 때 이전 개념의 망각
- 각자의 편견과 선입견을 통해 조작
- 조작된 기억으로 인해 앞으로 일어날 상황까지 착각함
- 새로운 기억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이전에 가지고 있던 기억이 사라질 수도 있음
에피쿠로스 학파의 이상적 상태는 아타락시아, 스토아 학파의 이상적 상태는 아파테이아, 기독교의 최종 목표는 천국, 불교의 최종 목표는 극락세계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스스로 이상적 상태를 생각해내고 목표를 정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목표, 상태를 뒷받쳐주는 근거는 어떤 과정을 통해 도출해낼까요? 저는 이것을 세 단계로 나누어 말해보겠습니다. 첫번째, 우리는 기억을 조작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상의 인물 A씨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둘러쌓인 모습을 목격했다고 합시다. 이때, 우리는 각자의 편견, 선입견을 통해 그 상황을 왜곡시킵니다. 즉, 똑같은 상황을 스스로에 의해 다르게 받아들인다는거죠. (처음 개념의 조작화) 두번째, 우리는 조작된 기억을 통해 착각하게 됩니다. 저는 방학 한국사 시간 때 ‘문화’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저는 1학기 영어시간 때 다하지 못한 결핍의 핵심내용을 설명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끝나지 않는 공식’을 주제로 말하였는데,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류’였습니다. 왜냐하면 ‘오류’가 있어야지만 ‘끝나지 않는 공식’이 성립되기 때문이죠. ‘오류’의 전제조건을 저는 이렇게 두었습니다. ‘사람들은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착각하고 그로인해 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낼 수 없게 되는 역설적인 딜레마에 빠져있다.’ 이것을 적용해보면 우리는 조작된 기억으로 인해 앞으로 일어날 상황까지 착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상의 인물 A씨가 다수의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있는 모습을 우리가 목격할 때, 만약 B라는 사람의 기억 속에 학교폭력에 관한 내용이 있다면 A씨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고 착각할 수 있을 것이고, C라는 사람의 기억 속에 만화책에서 본 1 vs 다수 장면이 남아있다면 A씨가 1 vs 다수로 싸운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세번째, 우리는 이러한 기억들로 인해 망각하게 됩니다.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라는 심리책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뇌에 정보가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을 때 세뇌당하기 쉽다.’ 이 말을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두뇌는 정보가 너무 많을 경우 그 정보를 받아들이기 위해 이미 저장된 기억을 지워버리고 (망각) 새로운 정보를 저장하거나 정보가 너무 적을 경우 이전에 가지고 있던 기억을 무시하고 (망각) 맹목적으로 어떠한 정보라도 받아들이려 한다는 겁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와 복종’에 관한 실험입니다.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에 따른 사람들의 복종’을 연구하였고, 이는 오늘날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듯이 저도 행위보단 행위를 하게 된 원인에 집중하였는데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은 참가자 중 65% 이상이 최악의 상황까지 복종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당시에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만큼 높은 수치였는데, 그때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였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아픔을 경험하였는데 그들은 왜 복종하였는가. 저는 그 상황에서 기억의 망각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조작된 기억, 착각(불합리한 권위는 불복종)과는 전혀 다른 상황 (실험)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거라고 생각했던거죠. 결국, 65% 이상의 사람들은 버튼을 눌렀고, 이 실험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심리학자, 사회학자가 많은 사람들의 행동을 정의내리는 수단 중 하나로 쓰이게 됩니다. 어찌됐든,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을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도출해내고 이를 근거로 자신의 생각, 주장을 이론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결핍 4] <결과의 상실과 무감각의 상태>
- 행위의 이유 = 99%의 고통 + 1%의 결핍
- ‘결과의 상실’이란, 효용의 감소를 의미함 (이때 당시, 아무것도 몰랐다..)
기독교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계획된 우연’ 즉, 우리 인생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일을 신께서 계획하셨다는 말인데, 우리는 인생의 청사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계획을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 스스로 기회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계속해서 발표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쾌락을 추구하는 걸까요. 저는 쾌락이 고통을 둔감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즉, ‘결핍의 감소’ 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완전한 완성은 두번 다시 반복하지 않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정말로 배고픔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단 한번의 식사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무지함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단 한번의 공부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기에 끊임없는 고통을 느끼고 이러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쾌락을 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행위로 고통을 줄일 수 있을까. 저는 이러한 행위를 반복할수록 ‘결과의 상실’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상위 1%의 부자 갑씨가 있다고 봅시다. 갑씨는 부동산 사업을 해서 아파트를 100개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씨는 순간의 실수로 인해 아파트 하나를 날려버리고, 그것을 되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여기서, 아무리 갑씨가 노력하더라도 발생한 손실을 완벽하게 메꿀 수 없다고 가정합시다. (재산과 가치는 매 순간 달라짐, 똑같은 가격의 자산이더라도 감가상각비나 매입세액 등이 다름을 고려) 계속해서, 갑씨는 잃어버린 아파트와 비슷한 가치를 가진 자동차를 얻었지만 전체 효용이 감소하였습니다. 그러나 갑씨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행으로 여깁니다. 상위 1%에서 2%로 하락한 갑씨는 회사 일이 잘 안되서 아파트 하나를 처분합니다. 회사가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갑씨의 재산은 또 줄었습니다. 그러나 갑씨는 크게 개의치 않고, 다행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우리는 갑씨가 고통을 해결하려는 행위가 오히려 이전의 재산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산 = 효용) 처음에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다음에는 자신의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말이죠. 이것을 반복할수록 갑씨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갑씨는 이 일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그렇다면 갑씨는 최종적으로 가난해질까요?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므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는 순간부터 손실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완벽한 해결책이 있을까. 저는 모든것이 완벽한 세상에서는 모든 감정이 없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배고픔을 해결했기에 배부름을 더 이상 느낄 수 없고, 외로움을 해결했기에 더 이상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거죠. 아마 사람들도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자살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요약하겠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쾌락을 추구하지만, 고통의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끊임없는 ‘결과의 상실’이 발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고통도, 쾌락도 느낄 수 없는 완벽한 무감각의 상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결핍5] <물질적 결핍과 정신적 결핍>
얼마 전에, 저는 결핍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사람들은 누구나 해낼 수 있다고 착각하고, 그로 인해 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낼 수 없게 되는 역설적인 딜레마에 빠져서 무엇을 반복하든지 항상 완성이라고 부르고 끊임없이 오류를 반복하는 ‘끝나지 않는 공식’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공식이 적용이 되지 않는, 이 공식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결핍을 ‘정신적 결핍과 물질적 결핍’ 으로 나눠서 말해보려 합니다. 몇 달 전, 저는 교회 목사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구원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저는 모든 사람들이 신을 믿지만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신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었고, 내일도 있기에 (즉, 영원하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의 모든 죄(과거에 지은 죄, 현재 짓고 있는 죄, 미래에 짓게 될 죄)는 모두 영원히 용서하여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끝나지 않는 공식’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이 공식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식의 적용 가능성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저는 이것을 퍼즐에 빗대어 생각했습니다. 첫번째, 모든 퍼즐조각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 하에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춥니다. 퍼즐을 맞추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퍼즐 조각을 손에 쥐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퍼즐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이 상황에서 ‘끝나지 않는 공식’의 결과는 ‘완성’으로 끝이 납니다. 다른 결과가 나올 확률은 극히 드물기에 ‘물질적 결핍’을 충족할 확률은 100%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정신적 결핍’을 충족시킬 확률은 오히려 낮아집니다. 두번째, 퍼즐조각이 몇 조각 부족하다는 가정 하에 퍼즐을 맞춥니다. 이 사람은 자신에게 퍼즐이 몇 조각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퍼즐을 완전히 완성할 수 없다고 판단할 겁니다. 이 경우, ‘물질적 결핍’을 충족시킬 확률은 거의 0% 이지만 ‘정신적 결핍’을 충족시킬 확률은 증가합니다. ‘호접지몽’ 이란 말을 다들 아실겁니다. ‘내가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내가 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한 꿈’을 뜻하는 말인데, 물론 현실이 꿈은 아니겠지만 우리도 이와 같이 아주 생생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갖춘 채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무언가 항상 부족한 채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은 환원주의적 사고방식을 갖추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부족함이 없기에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거죠. 그와 반대로 무언가 부족한 사람은 그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 사람은 매 순간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똑같은 행위를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그 허전함이 클수록 말이죠. 퍼즐 조각이 부족한 사람은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과연, 내가 채운 퍼즐이 비워진 걸까, 비워진 공간이 채워진 걸까.’ ‘꼭 정해진 틀을 완성해야만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채워야 할까, 아니면 나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까.’ 이 사람에겐 ‘끝나지 않는 공식’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미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퍼즐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빠르게 완성할 수 있을까’,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을까.’ 이 사람은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시각이 차단되어 버리고 오직 하나에만 집중하며 살아갑니다. 분명 가지고 있는 퍼즐이 그 틀 안에 다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죠. 결국, 이 사람은 ‘끝나지 않는 공식’ 안에서 ‘결과의 상실’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예전에 말한 갑씨와 비슷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If를 사용해봅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 ‘존 바이퍼’ 께서는 얼마 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 왕은 밧세바 여인을 성폭행하고 그 여인의 남편을 죽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왕께 충성을 다하고 죽은 장군의 아내를 보살펴주신다고 보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의 인생까지도 모두 책임져주신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윗왕은 성경책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분이지만, 그리고 이 하나의 죄로 인해 후대에까지 죄의 영향을 끼치게 되지만, If(만약) 우리가 밧세바의 어머니였다면, 우리아 장군의 아버지였더라면 과연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었을까.’ 이것을 여기에 적용해봅시다. 만약, 자신이 가지고 있는 퍼즐 조각을 알아차리지 못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다시 퍼즐로 돌아가서 첫번째 사람과 두번째 사람은 동일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퍼즐을 완성해라. 이 경우, 두 사람 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퍼즐 조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끝나지 않는 공식’에 의해서 반복됩니다. 만약,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끝나지 않는 공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예전에 말한 갑씨에 대해 말하자면, 갑씨는 ‘결과의 상실’을 깨닫지 못하기에 지속적으로 손해가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갑씨는 최종적으로 가난해질까? 갑씨는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끝나지 않는 공식’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또, 갑씨는 자신이 부족함을 채울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끝나지 않는 공식’에 의해 반복됩니다. 그리고 갑씨는 자신의 행위의 원인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끝나지 않는 공식’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애초에 갑씨의 행동 자체가 모순이므로 ‘끝나지 않는 공식’이 성립됩니다. 여기까지가 ‘결핍’ 이었습니다. (이 뒤부터는 끊어져 있어서 ‘상상’으로 생각한 내용) 우리가 느끼는 ‘물질적 결핍’은 ‘정신적 결핍’이 선행되어 뒤따라오는 것이기에 전체 자산의 증감을 인식하는 것과 다르게 결과에 대한 만족도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처럼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같은 결핍 해소에 대해 느끼는 감각(도파민)이 둔해지고(감소), 모든 퍼즐 조각을 가진 사람은 뇌과학과 경제법칙에 근거하여 퍼즐이 부족한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정신적 결핍을 느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끝나지 않는 공식’의 오류는 똑같은 행위를 반복할수록 점점 더 큰 성과를 얻고 싶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핍 1번째 내용에서 우리는 다양한 삶의 문제를 합리화 한다고 말하였고, 사람마다 가진 퍼즐 (재능, 환경, 역량, 돈 등등..)이 다 다르며 그에 맞게 결핍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 똑같은 ‘결핍’을 서로 다른 관점과 용어로 구분지어서 ‘종교’나 ‘독서’, ‘토론’이나 ‘교육’ 등으로 세분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결핍을 해소할수록 우리가 반복하는 행위가 가지는 극한값의 근삿값은 1에 가까워지지만, 가까워질수록 더 큰 결핍을 느끼게 되는 것이 ‘정신적 결핍’의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결핍 4번째 내용에서 말하는 ‘결과의 상실’이란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래서 2017년의 저는 ‘무감각의 상태’를 말하면서, ‘자살’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확실한 것은, ‘청년 자살’이니 ‘욕심이 많다’, ‘꿈이 크다’, ‘무리 하지마라’ 등등의 말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도 안된다는 거죠. 2017년의 저는 비관주의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물질적 결핍’을 해소하려는 행위 자체가 ‘정신적 결핍’을 해소해준다고 생각하고, 심리학과 사회비판주의의 책을 너무 많이 보면 안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